
2025년 현재,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은 디지털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법정 디지털 화폐로, 기존 전자화폐나 가상화폐와 달리 국가 신용을 기반으로 한다. 현금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한 지급 수단을 넘어 금융시스템 전체를 재편할 잠재력을 지닌다. 한국은행 역시 2024년부터 CBDC 모의실험을 진행하며, 본격적인 도입을 준비 중이다. 이 제도가 상용화되면 결제 효율성, 금융포용성, 통화정책의 유연성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동시에 금융 안정성과 개인정보 보호, 시스템 보안 등의 새로운 과제도 등장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CBDC의 개념과 구조, 주요국의 도입 사례, 한국형 CBDC 실험 현황, 그리고 금융 시스템 전반에 미칠 변화를 분석한다.
1. CBDC의 개념과 구조적 특징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화폐다. 기존의 전자지급수단은 상업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하지만, CBDC는 법정통화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중앙은행의 부채로 기록된다. 구조적으로는 ‘소매형(retail)’과 ‘도매형(wholesale)’ 두 가지로 구분된다. 소매형은 일반 국민이 사용하는 형태로, 전자지갑을 통해 직접 중앙은행 계좌와 연결된다. 도매형은 금융기관 간 결제와 청산에 활용되는 형태로, 기존의 지급결제 시스템을 대체하거나 보완한다. CBDC의 핵심 기술은 블록체인(또는 분산원장)으로, 거래 기록의 투명성과 보안성을 보장한다. 또한, 중앙은행은 거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여 자금 흐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동시에 ‘감시 금융’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개인의 거래정보가 모두 중앙화된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될 경우, 개인정보 보호와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BDC의 설계는 ‘효율성과 익명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2. 주요국의 CBDC 도입 현황과 차별화된 접근
세계 각국은 자국의 금융환경과 정책 목표에 맞춰 다양한 형태의 CBDC를 실험하고 있다. 중국은 2020년부터 디지털위안화를 시범 운영하며, 이미 2억 명 이상이 전자지갑을 사용 중이다. 결제 인프라의 효율성뿐 아니라, 글로벌 결제시장 주도권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를 통해 상업은행과 협력하는 2단계 유통구조를 검토 중이며, 2026년 정식 도입을 목표로 한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는 민간 결제시장의 경쟁력과 금융 프라이버시 우려를 이유로, CBDC 도입을 장기 과제로 두고 연구 중심 접근을 택하고 있다. 일본, 싱가포르, 캐나다 등은 도매형 CBDC 중심으로 실험을 진행하며, 금융기관 간 결제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처럼 각국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결제 효율성 향상’과 ‘통화정책 유연성 강화’라는 점이다. CBDC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각국의 경제 주권과 금융질서를 재편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있다.
3. 한국형 CBDC 실험의 현황과 구조
한국은행은 2021년부터 CBDC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으며, 2024년에는 ‘CBDC 2단계 실험’을 완료했다. 이 실험에서는 블록체인 기반의 결제 시스템이 실제 금융 네트워크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검증했다. 한국형 CBDC는 하이브리드 모델로,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를 상업은행이 유통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앙은행의 직접 통제와 민간 금융의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것이다. 또한, ‘오프라인 결제 기능’이 포함되어 인터넷 연결이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한국은행은 향후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여 지역화폐를 CBDC로 통합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는 지역경제 활성화와 자금 순환의 투명성 제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실험 과정에서 처리속도·보안성·개인정보 보호 등 기술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거래 기록의 중앙 집중화가 프라이버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어, 분산형 개인정보 보호 기술 도입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4. 금융 시스템 변화: 통화정책과 은행 역할의 재편
CBDC가 본격 도입되면 금융시스템의 구조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우선 통화정책의 전달력이 강화된다. 중앙은행은 CBDC 이자율을 조정해 실시간으로 경기 대응이 가능하며, 정책 효과가 상업은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예를 들어, 경기 침체 시 CBDC에 음(-)의 금리를 적용해 소비를 유도하거나, 경기 과열 시 예치 한도를 제한해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상업은행의 중개 기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이 중앙은행에 직접 계좌를 보유하게 되면, 예금이 상업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이동해 ‘디지털 뱅크런’ 위험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상업은행이 CBDC 유통을 담당하는 2단계 구조를 통해 이런 리스크를 완화하고자 한다. 또한, CBDC의 도입은 지급결제 시장의 독점 구조를 완화하고, 핀테크 기업의 참여를 확대할 가능성을 연다. 금융의 탈중앙화와 공공성이 공존하는 새로운 균형점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5. CBDC의 장점과 잠재적 리스크
CBDC의 가장 큰 장점은 결제 효율성이다. 현금 운용비용이 감소하고, 결제 시간이 단축되며, 송금 수수료가 낮아진다. 또한, 금융 포용성 측면에서 은행계좌가 없는 계층도 디지털 지갑을 통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세금 징수, 복지금 지급 등 공공재정 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반면, 잠재적 리스크도 명확하다. 첫째, 사이버 공격이나 시스템 오류로 인한 금융 인프라 마비 위험이 존재한다. 둘째, 거래 데이터가 중앙화되면서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금융기관 간 자금 이동이 급격히 일어나면 유동성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이중 보안망 시스템’과 ‘익명성 보장형 거래 프로토콜’을 병행 도입할 계획이다. 또한, CBDC 운영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부정거래 감지 및 금융 범죄 예방에도 활용할 예정이다. 즉, CBDC는 금융 혁신이자 동시에 보안·윤리적 도전이기도 하다.
6. 향후 과제와 국제 협력의 필요성
CBDC 도입은 단순한 국내 금융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금융질서 재편과 직결된다. 국경 간 송금과 무역결제, 환율정책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국제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국이 자국 통화를 디지털화하면서 ‘통화 패권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술 표준화와 법적 기반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첫째, 국제결제은행(BIS)과 협력해 글로벌 CBDC 상호운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개인정보 보호와 AML(자금세탁방지) 규제를 조화롭게 설계해야 한다. 셋째, 사회적 신뢰 구축이다. CBDC는 국민이 직접 사용하는 화폐인 만큼, 시스템의 안정성과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대중의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이 해결된다면, 한국형 CBDC는 단순한 디지털 화폐를 넘어 ‘국가 금융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도입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금융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결제 효율성, 금융포용, 통화정책의 유연성 등 긍정적 효과가 기대되지만, 동시에 보안·개인정보·은행 역할 축소 등 새로운 리스크도 존재한다. CBDC의 성공은 기술적 완성도보다 ‘사회적 신뢰’에 달려 있다. 국민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 그리고 국제 협력 속 표준화가 병행될 때, 디지털 화폐는 국가 경제의 새로운 기반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결국 CBDC는 화폐의 디지털화가 아니라, ‘신뢰의 디지털화’이며, 그것이 21세기 금융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이다.